아웅산묘소폭발사고 후일담

아웅산묘소폭발사고 후일담

 

잘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웅산 폭발사고는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버어마(지금의 미얀마)를 순방 중에

북한 공작원 3명이 설치한 크레모어 등 폭탄에 의해 우리 정부 고위관료.의원 17명(부총리,청와대 수석, 장/차관, 국회의원 등)

을 포함해서 21명이 순직한 사건이다.  (개그맨 심현섭 아버지 심상우 의원도 이때 수행원으로 갔다가 돌아가셨다.)

얼마전 특전사령관 하던 전인범 장군이 중위 짬밥에 합참의장 부관으로 따라갔다가 모시던 영감님을

폭파 잔해 속에서 구해낸 일이 있기도 하다.

 


휴전 이래로 데프콘3가 두 번 있었는데 그게 미루나무 도끼만행 사건과 이 아웅산 사건이다.

김신조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이 때도 특전사 등에서 응징보복부대를 만들어서 x빠지게 훈련하다가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접은 사실도 있다.(계획 당시 퇴출방법은 없었던 걸로 안다, 자살부대였다.)

 


아웅산묘소폭발사고가 터진 지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몇 가지 후일담을 보면

 


1. 아웅산 묘소 현지에 추모비 건립

 


웃기는 일이지만 1983년에 테러사건이 터지고 30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아웅산 묘역 현지에는

추모비 하나 없다가 작년인 2014년에 짤과 같이 추모비가 건립되게 되었다.

 

 이 일을 추진한 사람은 2012년에 엔두 이후 최초로 미얀마를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

 

 

 

 


2. 테러 공작원들 체포과정에서의 북한의 뒷통수

 


아웅산 테러 범인은 북한 정찰국 소속 3명이었는데 이 중 1명은 체포과정에서 사살되고

김진수 소좌, 강민철 상위 2명이 살아서 체포되었다.

이 중 김진수 소좌는 다음 해인 1984년에 사형되었는데 이 당시 버마는 자국의 국가원수 뿐 아니라

타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는 자도 사형에 처하도록 형법을 바꾸기까지 했다.

 


김진수든 강민철이든 눈이 멀고 팔이 날아가는 등 몸이 10창난 상태에서 체포됐는데

이게 교전과정에서 버마군에게 수류탄을 던지려고 한 것이 손에서 폭발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김진수,강민철,신기철>

 


원래 공작조가 임무를 완료하면 양곤 강가에서 고속정이 대기하고 있다가 인근 해상의 북한 화물선으로 퇴출시켜주기로 했었는데

막상 x빠지게 가보니 고속정은 종범에다 쫓아오는 버마군한테 수류탄을 던지려고 하니 수류탄이 손에서 터져버린다.

 

이건 수류탄 불량이 아니라 '이 새x들이 수류탄까지 던질 상황이면 100% 잡히는 각이다'는 생각에

북한 새x들이 아예 안전핀 뽑자마자 터지도록 미리 뇌관을 작업해 놓은 수류탄을 지급해 준 거였다.

고속정 따위는 원래 있지도 않았고...

 

이후에도 북한은 강민철이 죽을 때까지 어떠한 방문과 접촉도 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 발표는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려는 남조선 인민의 자발적 의거' 였기 때문이다.

 

 

 

3, 강민철의 자백과 최후


더블 뒷통수에 얼얼해 있던 북한 공작원 두 명 중 팔과 눈 하나를 잃은 김진수는

'에라 씨x거 이리 사느니 뭐하겠냐' 싶었는지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한 끝에 사형당했지만 팔 하나만 잃은 강민철은

 북한의 뒷통수에 감동을 받아 수사에 협조하고 자백을 했다.

 

이 자백에는 당시 버마 정부에서 붙여준 미모의 간호사의 친절한 간호로 인해 강민철이 삶의 의욕을

되찾은 데도 원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백을 해서 사형집행 유예를 받은 강민철은 이후 감옥에서 버마어를 배우고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지만

25세에 체포되어 25년간 옥살이를 하다 2008년에 간암으로 감옥에서 사망한다.

그의 시체는 그냥 화장해서 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4, 강민철의 복역 25년간의 기록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 이후 미얀마는 북한과 외교를 단절하게 된다.

 


1998년(김머중 집권기)에 국정원의 한 간부는(나종일 전 국정원1차장)

'아웅산 테러 이후 지금까지 강민철과 북한과의 접촉은 단 1건도 없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얀마 정부를 설득해서 국정원 요원을 15년간 독방에 갇혀있었던 강민철과 만나게 한다.

 


처음에 강민철은 '남한이고 북한이고 다 x같은 새x들' 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자기 인생을 망친 민족이라 다 꼴보기 싫다는 거였다. 하지만 강민철도 15년만에 들어본

한국어와 국정원 요원이 챙겨준 사식 및 영치금이라는 최초의 환대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국정원 요원을 형님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자기 몸에 부상당한 흔적도 보여주며

'만일 석방이 된다면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몇 년 간 강민철과 접촉해 오던 국정원은 2004년(고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에 강민철의 석방협상을

정부에 건의한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볕정책을

고 노무현 대통령 정권에서는 당연히 미친거 아니냐? 이라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었고

강민철은 남북한 모두에게 잊혀진 인물이 된다.

 


이후 수 차례 쿠데타를 거듭하던 미얀마는 2007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재개하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강민철은 극도의 불안에 빠지게 된다. '북에서 증거를 없애기 위해 내 밥에 독을 탈지도 모른다'

는 불안감과 '나는 풀려나도 갈 곳이 없다'는 좌절감으로 인해 강민철은 끝내 암에 걸려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상 아웅산묘소폭발사고 후일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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