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압생트 초록 요정의 탄생

skdna 2019. 2. 7. 16:25

19세기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술 압생트(Absinthe)는 스위스에서 유래된 술로 증류한 알코올에 아니스(annis), 회항(fennel), 쓴숙(wormwood)  3 가지 허브 약초를 빻아 넣은 후 그 혼합물로 다시 증류하고 이렇게 나온 술에 무색이라 다시 여러 허브를 넣어 칠술 시켜 제조되는 방식을 쓴다.

 

리큐르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당분이 첨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리큐르 종류는 아니고 증류한 후 허브를 넣어기 때문에 인쥬징된 증류즈에 가깝다.한편으로 스피리츠로 분류해야 된다는 주장도 있다.

 

술을 따라서 색깔을 보면 형광녹색이다. 맛은 여성용 향수향도 나고 맛은 상당히 씁쓸하다. 마치 데킬라처럼 특유의 향이 매우 진해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전용 잔과 스푼을 이용해서 각설탕을 올리고 물에 타 마시는 특이한 음용법으로도 유명하다.

 

1. 정량이 표시된 전용 잔의 일정 부분까지 압생트를 따른다.

 

2. 잔 위에 바닥에 구멍이 송송 뜷려있는 전용 스푼을 걸쳐놓고 그 위에 각설탕을 올린다.

 

3. 차가운 물을 서 너 방울 떨어뜨려 각설탕에 스미게 한다. 각설탕이 천천히 녹아 스푼의 구멍을 통해 압생트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4. 설탕이 거의 다 녹아 떨어질 무렵에 남아 있는 설탕을 씻어내듯이 찬 물을 서서히 가는 물줄기로 따른다. 투명한 녹색이던 액체가 차가운 물과 반응해서 탁한 젖빛의 흰 액체로 변하면 마신다.

(압생트 마실때 사용되는 특이한 숟가락들)

 

제조과정을 보면 쉽게 말해서 곡식이 아닌 풀 뜯어서 담근 술이지만 왜 예전에는 유럽과 미국에서 판매금지가 되었을까? 19세기로 돌아가서 그당시 예술가들은 이 술에 취해 화가나 문인들은 예술을 논했다고 한다. 특히 압생트를 즐겨 마셨던 유명한 예술인들이 많다.

 

압생트 '초록 요정' 이란 이쁜 별명으로 시작으로  '에메랄드의 유혹' 여자 유혹하는 술로 인기몰이를 하다 점점 안좋은 별명이 붙기 시작한다. 압생트는 '녹색의 마귀' 그리고 결국에 압생트는 '악마의 술'이 되어 버린다. 그 시대 압생트의 요정에서 악마라는 극과 극을 달리는 별명을 가졌던 술.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강요로 여장을 했어야하는 트라우마도 극복하고 투우, 복싱 같은 남성미 넘치는 스포츠를 즐겼던 헤밍웨이. 20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1차 세계대전 전장을 누비며 종군 기자로 죽임의 고비를 10번도 넘기고 군인으로서도 무훈을 세웠던 상남자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술도 압생트 였다.

 

상남자 헤밍웨이는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에 체류하면서 미국이 낳은 최고의 카사노바로 살면서 파라의 식도락 문화에 빠졌다. 카사노바처럼 장어, 굴과 함께 압생트를 즐겼던 헤밍웨이는 압생트를 이 술을 '오후의 죽음', '녹색의 마주' 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피카소, 모파상, 보들레드, 드가, 르노와 등 수 많은 예술인이 즐겨 마셨던 술이자 가난한 예술인들도 마실 만큼 가격이 저렴했다. 하지만 이 술에 취하면 환각, 환청, 착시 현상등 알코올에 취한 일반적인 술과 달리 마약에 했을때 나오는 경험할수 있다는 것이다.

 

(두 화가가 노란 집에서 독주를 마시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다. 일방적으로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는 쪽은 깡마른 쪽이다. 살집이 있는 쪽은 매사가 귀찮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모욕스러운 말을 한마디씩 던진다. 반면 소리 지르는 쪽의 이야기는 횡설수설이다.

 

상대방의 작풍에 대한 불만 같다가도 어느새 신의나 우정 같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 그리고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과거의 사소한 기억들, 깡마른 화가의 화제는 전기에 쏘인 벼룩처럼 정신없이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화내던 쪽이 다른 쪽이 툭 던진 말에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서 욕실로 달려가더니 접이식 면도칼을 가지고 돌아온다. 술에 취해 비척거리며 그 칼로 “죽여버리겠다”고 상대를 위협해보지만 상대는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그 친구의 입가에 슬며시 보이는 비웃음을 칼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던 화가는 발작적으로 자신의 왼쪽 귓볼을 잡아당겨 잘라버린다.

 

아릿한 통증과 볼을 타고 턱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에 정신이 들어 보니어느새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놀라서 도망갔을 테지, 자신의 귓볼을 자른 화가는 신문지를 꺼내 잘린 살조작을 되는 대로 포장하더니 조악한 흑백 양배추처럼 변한 그 신문지 뭉치를 들고 낄낄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1888 고흐 자해 사건' 이다. '스스로의 귀를 자른 천재화가의 광기' 라는 시대적 낭만을 풍기는 이 '19세기 보헤미안 엽기사건' '압생트 괴담'을 이야기 할 때 항상 언급되는 이야기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성분이 들어간 이 술에 중독된 고흐는 환각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자르는 기행을 보였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흐의 환상적인 노란색 표현도 사실은 압생트 남용으로 의한 황시증(모든 자연이 노란색으로 보이는 현상) 있다고 하는데 고흐의 그림 중 유난히 밝은 노란색이 많이 유난히 표현된 그림들이 많다.

 

일각에서는 고흐가 귀를 짜른 것도 정신병 때문일수 있지만 압생트 중독자였던 고흐가 많이 마신 결과물이 아닐까 라고 추측도 있다. 예술 평론가 중에 고흐를 키운건 압생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고흐)

 

19세기 유명한 화가들은 그림 속에 술을 자세히 보면 압생트가 등장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드가 '압생트' 1876)

 

너무나 표현이 잘되어 있다. 뒷벽의 그림자로 봤을 때 어둠이 깔려가는 초저녁 무렵이고 한쌍의 남녀가 압생트 한 병과 술잔을 놓고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미 취해서 초점을 잃은 여인과 냉담한 표정으로 딴 곳을 응시하고있는 남자.

 

(파카소 '압생트 마시는 사람' 1923)

 

피카소 또한 압생트를 많이 마셨다고 한다. 압생트 한잔을 앞에 두고 고독과 추위 배고픔을 표현한 그림이다.이 그림은 700억에 팔렸다.

 

(앙리 로트렉 '압생트 마시는 반 고흐' 1887)

 

우울하고 괴팍한 기질을 고흐의 내면의 세계까지 이해하며 절친되었던 로트렉이 그림. 카페 테이블 앞에 압생트를 마시면 사색에 잠긴 고흐

 

(빅토르 올리바 '압생트와 초록요정' 1901)

 

압생트에 취하면 나타는 초록요정을 표현한 그림

 

 

- 압생트의 탄생

 

압생트는 18세기 말 스위스 서쪽 노이샤텔지방의 꾸베지역에 거주하던 피에르 오르디네르라는 프랑스인 의사가 만병통치약으로 개발한 약술이라는 탄생설화를 가지고 있다.

 

오르디네르는 깡마른 몸에 농구선수급의 장신으로 애마인 ‘로켓’을 타고 산악지역인 발드트라베르 지방을 누비는 모습이 사뭇 동키호테 같았던 기인이었던 것 같다.

 

프랑스혁명의 어지러움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간 이 의사는 시골인 쿠베라는 곳에서 동네 약방 비슷한 걸 경영하고 있던 묘령의 미녀 자매가 사는 집에 거처를 잡고 시골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며 살아가다 19세기의 시작도 못보고 죽었다.

 

이 괴짜 의사의 이야기는 낭만과 오해로 가득한 압생트 전설의 처음을 장식하기에 부족하지 않다.서양의학이 미생물학의 발달로 뭔가 과학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건 겨우 몇 세기 동안의 이야기일 뿐이고 그 전까지는 의사의 주수입원이 자신이 개발하거나 전가의 비법으로 만든 수상한 만병통치약의 판매였다는 점은 동양의 민간의학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당시의 만병통치약은 간단하게 만들었다. 생약성분이 들어있을 거라 생각되는 약초나 꽃잎 같은 식물 생약성분과 여기에 화끈한 약효를 실감나게 하기 위해 높은 도수의 알코올을 섞는다.

 

한무당이 하는 짓하고 비슷하지만 많은 생약성분이 알코올에 용해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경험에서 얻어진 지혜라고도 생각된다. 오르디네르 역시 알프스 지방의 산바람과 햇살을 맞고 자란 싱싱한 약초를 따서 알코올에 섞어 증류해보는 실험 끝에 1792년에 드디어 오르디네르식 만병통치약을 완성시키게 된다.

 

영롱한 에메랄드 빛깔 때문에 “녹색 요정(La Fée Verte)”이라 불리기 시작한 이 약물은 원샷하면

 

갑자기 열기가 돌고 주위의 여자들이 예뻐 보이며 기운이 나고 용기가 솟는 약효가 있었고 제법 맛도 상쾌하고 먹고 푹 잤더니 감기가 나았다. 알코올 70도짜리 독주를 마시면 당연한 나타날수 있는 증상들이지만 입소문이 돌면서 그 지방에선 꽤나 인기 상품으로 자리잡게 된다.

 

18세기 말 당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저런 식의 “만병통치약”에 대한 믿음은 도시 지역에서는 없어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노이샤텔 같은 깡촌에선 먹히는 장사법이었다.

 

하지만 그 약을 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오르디네르는 노환으로 쓰러지고 그의 임종을 지키고 있던 “약방 자매” 에게 압생트의 비법을 남기고 죽어버리고 그의 유지를 이어 받아 자매는 그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만병통치약을 팔기 시작한다.

 

이 탄생설화의 요지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짜 개발자는 이 약방자매 쪽이고 단지 마케팅을 위해서 '오르디네르'라는 유명한 (게다가 마침 자기네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의사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볼 수도 있다.

 

사실 오르디네르 선생이 꾸베 지방으로 쫓겨오기 전부터 이 지역에서는 비슷한 레시피의 만병통치약이 무려 신문광고까지 해가면서 팔리고 있었다. 어쨌든 '프랑스에서 온 그 괴짜 같지만 유능한 닥터하우스가 개발한 약' 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 녹색요정은 몇 년 새에 커다란 인기를 얻었고 결국엔 프랑스 자본가에 의해 픽업되어 메이저 데뷔를 하게 된다.

 

압생트 시작은 약방자매로 부터 제조비법을 독점 구매한 한 스위스에 공장을 차린 주류업자 다니엘 앙리 두비와 그의 사위인 앙리 루이 페르노 였다. 지금은 전세계에서 유명한 Pernod Ricard 기업의 시작이었다.

 

발렌타인, 시바스리칼, 칼루이, 말라부, 압솔루트 등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주류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주류업계의 공룡 페르노리카의 창업 아이템이 봐로 압생트 였다.

 

특별 제조비법으로 주조된 술은 두비와 프레노는 프랑스인 의사가 스위스의 상쾌한 자연에서 만들어낸 상괘한 '약 같은 술' 이라는 마켓팅 이미지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마케팅은 성공했고 군인 출신이었던 두비는 군경력과 인맥으로 군부대와 큰 계약을 하고 이때부터 대량생산을 하기 시작한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르를 침공하여 신민제국을 열기 시작하던 그 시절 아프리카에 파견된 프랑스 군을 가장 힘들게 한건 전투가 아닌 아프리카의 풍토병들이었다.

 

말라리아나 이질 같은 풍토병에 내성이 없던 프랑스 군인들은 전투해서 다친 군인들 보다 더 많은 군인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압생트를 마신 군인들은 말라리아나 이질에도 견디고 용기도 솟고 전투에서 더 용맹하게 싸웠다고 보고되면서 군부는 정식으로 풍토병 예방약으로 '약같은 술' 압생트를 인정받게 되고 1844년부터 3년동안 정식보급품으로 지급되기도 했다.

 

풍토병을 예방하기 위해 한두잔씩 마시던 압생트의 묘한 향과 맛에 길들여지고 이렇게 길들어진 군인들은 본국에 돌아가서 압생트를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19세기는 새로운 과학기술과 천재 예술가들이 넘쳐났고 부르주아들의 캉캉댄서들의 속바지를 훔쳐보며 유혹하던 파티하기 좋은 시절이었다.그 파티시절에 모네가 있었고 마네가 있었고 르느와르가 있었고 드가가 있었고 고흐가 있었고 고갱이 있었고 로트렉이 있었고 그리고 압생트도 있었다.

 

군에서 약같은 술이라는 건강주라는 배경과 압생트에 들어 있는 성분도 제대로 모르고 프랑스 온군민은 압생트 사랑 하기 시작했다.그 당시 식전주 시장의 90% 점유하는 수준까지 왔다.

 

저녁시간이 시작되는 오후 5-6경에는 사람들이 압생트를 마시는 바로 그 떄를 가리켜 '녹색 시간'이라고 부를 정도로 압생트는 소비되기 시작했다.이렇게 인기 최고의 술이 탄생하자 양조업자들은 너도 나도 압생트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알코올에 허브를 넣고 증류하는 비교적 손쉽게 만들어 팔 수 있던 술이기 때문에 개나 소나 만들기 시작했지만 초창기 짝퉁 압생트는 저렴한 가격으로 팔리긴 했지만 돈 많은 부자들은 오리지날을 프리미엄 주면서 페르노리카에서 만든 압생트를 선호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결국에 약방자매의 레시피는 결국에 유출되었고 압생트를 만드는 업자들도 똑같은 술을 만들수 있게 되면서 압생트 가격은 어떤 술보다 저렴한 가격과 그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감춘져 프랑스의 역사과 같은 와인시장이 위협받는 수준까지 와 버렸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19세기 중반에 필록세라(포도뿌리벌레) 병충해의 대재앙이 오기 시작했다.프랑스만 하더라도 전국 포도밭의 40%를 잃었고 빠른 속도로 전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와인은 유럽 전역으로 공급부족에 시달리고 속성해서 판매하는 제품의 특성상 그 피해는 장기적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둙어진 와인에 건포도를 알코올로 우려낸 물도 와인으로 팔고 있었기에 프랑스인들은 와인에 의존했던 음주문화가 자연스럽게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했던 압생트로 넘어오는 행운도 있었다.

 

값싼 압생트는 소비층은 부자부터 가난한 노동자들까지 광범히 마시고 프랑스의 아름다운 시절 문화를 주도했던 예술가계층 흔히 '보헤미안' 이라고 불리던 인상파 화가들부터 자연주의 문화작가들 그야말로 이 시절의 문화를 선도하던 모든 프랑스 국민들은 압생트의 취기 속에 영감을 찾았다.

 

하지만 녹색요정에 취한 프랑스는 아름다운 시절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였다. 프랑스의 많은 국민들은 알코올중독으로 고생하기 하기 시작했고 압생트에 중독된 환자들은 정신병원을 가득 채우고 수전증부터 환각에 정신분열까지 골고루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작태를 프랑스정부는 개탄을 금치 못하고 종교단체인 청십자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금주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당연히 그 운동의 주타켓은 프랑스들이 사랑해 빠져있던 녹색요정이 아닌 악마의 술인 압생트였다.또 그당시에 프랑스 전체가 진보와 수구로 갈라져 싸운 드레퓌스 무고사건 때문에 카톨릭계의 유태인에 대한 감정이 무척 나빴는데 압생트 최초생산자인 페르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청십자회는 압생트이라는 술은 악마의 유혹이라는 명분까지 생겼다.

 

청십자회는 과학적인 근거도 제시하기 시작한다. 압생트에 들어 있는 풀(쓴 쑥)의 농축액을 생쥐에게 노출시켰더니 발작을 일이키면서 사망한다.

 

압생트 때문에 입원한 환자들을 보면 환각에도 시달린다고 하는데 압생트 안에 투존이라는 성분이 환각가 마비 발전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죽음! 이라는 당시 포스터)

 

한편으로 청십자회가 근거로 내놓은 연구결과는 결과를 정해 놓고 한 실험이기 때문에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반발 하는 과학자들도 많았다. 그러던 와중 1905년 스위스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압생트 금지에 힘을 실어주는 여론을 돌리는 기폭제 역활을 한다.

 

쟝 랑프레라는 서른 한 살의 농부는 부인과의 말다툼 끝에 자기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베테리제 라이플로 자신의 부인과 두 아이 (카톨릭의 입장에선 세 아이)를 쏴 죽여버린다.

 

말다툼하던 부인의 머리에 한 발, 총성에 놀래서 뛰어 들어온 네 살 짜리 큰 딸의 가슴에 한 발, 그리고 요람에서 자고 있던 한 살 짜리 둘 째 딸의 몸통에 한 발,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자살하려다가 그만 턱에 총알이 박힌 채 피를 흘리면서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리는데 이 후 부인의 시신을 부검해보니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체포되고 나서야 술에 깨어난 후 자신이 무참히 쏘아 죽인 사랑하는 가족의 시신을 보고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은 스위스의 조그만 마을을 충격의 도가니로 빠트렸다.

 

충격을 받은 마을사람들은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허공에 던지기 시작했고 몇 일 후 마을회의에서 그 착하고 선량하던 쟝을 살인마로 만든 범인은 바로 그가 즐겨 마시던 압생트라고 결론 지어버린다.

 

당시 유럽인들은 무절제하게 술을 마셔댔고 게다가 식민지 전쟁덕분에 총이 흔해져서 술김에 가족들을 쏴 죽이는 일이 꽤나 빈번한 편이었는데 랑프레 사건은 마을 사람들이 내린 “압생트가 범인이요”라는 황당한 결론 때문에 와인업자와 종교단체의 힘을 얻어 대대적으로 언론을 타게 된다.

 

압생트 때문에 돌아버린 게 정말인지 사건이 있던 날 랑프레이의 음주일지를 살펴 보자.


1. 아침에 일어나 쌉싸름한 압생트 두 잔 (당연히 물 타서)

 

2. 오전 5:30 일터인 포도원으로 나가는 도중, 동네 술집에 들러 크렘데멘테라는 리큐르와 물을 섞어 한잔, 그리고 꼬냑과 탄산수를 섞어서 또 한잔

 

3. 오후 12:00 점심시간에 빵, 치즈, 소시지와 함께 집에서 직접 담근 와인 석 잔

 

4. 오후 3:00, 일하다 말고 잠시 휴식, 휴식 중에 와인 두 잔

 

5. 오후 4:15 일하는 도중 한잔 하고 하라는 동네 주민의 권유에 와인 한 잔

 

6. 오후 4:30 일 끝나고 카페에 들러 커피에 브랜디를 타서 한 잔

 

7. 오후 5:00 와이프 보고 커피 한잔 달라고 하더니 커피에 집에서 직접 만든 독한 브랜디를 넣고 한잔. 커피가 안 따듯하다고 와이프한테 성질…

 

쟝은 하루에 보통 와인2리터와 도수가 높은 홈메이드 2리터 하루에 4리터 와인과 리큐르, 브랜드 등등 마셨는데 아침에 한두잔 마셨던 압생트가 원인으로 단정지어 버렸다.

 

압생트 때문에 벌어진 살인 사건은 단정짓기는 좀 황당하지만 언론은 이미 압생트가 살인의 원흉이라는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압생트 제조업자들은 유해성분이라고 알려진 투존이 빠진 압생트를 제품을 출시했지만 이미 게임은 끝나버렸다.

 

이 살인 사건의 시작으로 압생트는 초록 요정에서 악마의 술로 변해버리고 압생트법이 생기기 시작한다.1 906년 벨기에를 시작으로 1908년 네덜란드, 1910년 스위스, 1912년 미국, 그리고 결국 1915년 종주국인 프랑스도 판매금지법을 만들었다.